▣ 애(愛)의 정의 & 존재화와 자기화 ― (AN 4.128-여래의 놀라움 경2)(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40704)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P8_4GemTxQ
1. (AN 4.128-여래의 놀라움 경2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8_03&wr_id=10)의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의 일부입니다.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2&wr_id=288
사람들 즉 중생은 무명이 스며있고, 알 속의 존재고, 덮여있기 때문에 잡기(ālaya)-자기화(māna)-가라앉지 않음(anupasama)를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중생이 삶의 문제를 해소하고 중생으로의 삶에서 벗어나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가르침이 여래가 설하는 법의 의미인데, 잡지 않기 위한 법-자기화의 제거를 위한 법-가라앉음을 위한 법-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법입니다
(*) 특히, 잡기(ālaya)를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한다는 설명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소회를 드러내는 (SN 6.1-범천의 요청 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219
그래서 여래가 설한 법을 배워 알고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잡지 않고-자기화가 제거되고-가라앉고-무명이 제거된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것이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 출현하는 네 가지 놀랍고 신기한 법입니다.
이때, 잡기(ālaya)는 애(愛-taṇhā)의 성질이고, 가라앉지 않음(anupasama)은 들뜸(uddhacca)입니다. 그런데 (AN 6.116-들뜸 경)은 들뜸을 버리기 위해 사마타를 닦아야 한다고 해서 탐(貪)이 있을 때 들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이탐(離貪)은 들뜸을 버리는 것 즉 심(心)을 가라앉히는 과정이라는 것도 함께 알 수 있습니다.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9_04_11&wr_id=11
그런데 무명과 들뜸과 자기화는 오상분결(五上分結-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잡기의 성질을 가지는 애(愛)는 무명과 들뜸 위에서 소망과 탐(貪)이 함께한 것입니다.
2. 애(愛)의 정의 & 존재화와 자기화
이때, 애(愛)는 고집성제(苦集聖諦)여서 고(苦)의 원인인데, 이렇게 정의됩니다. ―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 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비구들이여, 다시 존재로 이끌고 소망과 탐(貪)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애(愛)가 괴로움의 자라남의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인데, 소유의 애(愛), 존재의 애(愛), 존재에서 벗어남의 애(愛)[욕애(慾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가 있다.」
여기서 ponobbhavika는 pono-(b)-bhavika이고, bhavika는 bhava: the state of existence. (m.)(존재-유(有))에 지말접미사 –ika(*)가 붙어 형용사화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존재에 속한 것(이 됨)’이어서 ‘존재화’가 됩니다.
; ponobbhavika 다시 존재화 됨
(*) 「§ 505. 지말접미사 –ka, –ika : 접미사 –ka 또는 –ika가 부가되어 형용사가 되는 경우(관계 소유 및 집합)」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빠알리-한글사전 902쪽)
ponobbhavika는
•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초기불전연구원)
•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한국빠알리성전협회)
• ‘which leads to renewed existence’(bhikkhu bodhi)
• ‘that makes for further becoming’(thānissaro bhikkhu)
• ‘which leads to renewed existence’(Peter Harvey)
• ‘that produces renewal of being’(Ñanamoli Thera)
• ‘which produces re-becoming (rebirth)’(Piyadassi Thera)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공통되게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경전연구회의 ‘다시 존재로 이끌고’도 같은 해석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경은 애(愛)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의 무명(無明)과 들뜸(≒탐)에 이은 애(愛) 그리고 자기화를 주제로 합니다. 사람들은 무명(無明) 위에서 잡기(ālaya)-자기화(māna)-가라앉지 않음(anupasama)를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부처님의 법은 잡지 않기 위한 법-자기화의 제거를 위한 법-가라앉음을 위한 법-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법입니다.
연기(緣起-삶의 메커니즘)로 접근하면, 무명과 들뜸은 애(愛)를 형성하여 잡는 성질을 부여하는 과정의 것이고, 자기화는 1차 인식으로 순환하여 나를 만들고[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 나의 것을 만드는[상(相)-nimitta] 작용입니다.
이때,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ahaṅkāra-mamaṅkāra-māna)는 ‘나’라는 자기화에 선행하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먼저 번뇌-무명에 조건 지어져 욕계 존재-색계 존재-무색계 존재[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로 구성되는 존재[유(有)-bhava]가 되어야 하고, 존재가 된 상태에서 그 존재를 ‘나’로 삼는 자기화가 이루어지면, ‘나’ 또는 ‘나의 것’이라는 자기화의 작용이 진행된다는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ponobbhavika는 ‘다시 존재로 이끌고’라는 몸이 무너진 뒤의 태어남을 이끈다는 의미에 앞서 지금 삶의 현장에서 수(受)를 대상으로 하는 2차 인식의 과정에서 ‘다시 존재가 된’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존재화’입니다. 그러면 딱까 안에서 존재화 즉 중생 존재가 되면 행위의 과정에서 인식으로 순환하여 ‘내가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로의 삶의 현장에 공동주관으로 참여할 때 자기화 즉 내가 되어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존재화가 몸이 무너진 시점에서는 ‘다시 존재로 이끄는(몸으로 가는)’ 원인이 되겠지만, 애(愛)의 정의에서는 지금 삶의 현장에서의 존재화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해는 존재와 반대되는 삶 즉 해탈된 삶에 의해서도 확인됩니다. 누진(漏盡)에 의해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생겨난 해탈된 삶은 애멸(愛滅)의 삶인데, 애멸(愛滅)에 의한 해탈된 삶을 사는 아라한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몸으로 가지 않는 현상도 있지만, 몸으로의 삶의 과정에서도 존재에서 벗어나(vibhava) 자기화하지 않은 삶 즉 해탈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의 삶에서도 아라한은 애멸(愛滅)-유멸(有滅) 그리고 자기화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은 번뇌들이 부서져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의 삶으로 정의되는 아라한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ponobbhavika가 ‘다시 존재로 이끌고’에 선행하여 ‘다시 존재가 된’이라는 해석은 타당합니다.
이제 애(愛)는 다시 정의됩니다. ―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 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비구들이여, 다시 존재가 되고, 소망과 탐(貪)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애(愛)가 괴로움의 자라남의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인데, 소유의 애(愛), 존재의 애(愛), 존재에서 벗어남의 애(愛)[욕애(慾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가 있다.」
● 애(愛-taṇhā)를 정의하는 3요소
• 기능[상(相)] : ponobbhavikā ― 다시 존재가 됨(존재화)
• 몸통[체(體)] : nandirāgasahagatā ― 소망과 탐(貪)이 함께함
• 역할[용(用)] : tatratatrābhinandinī ― 여기저기서(*) 기뻐함
(*) 여기저기서 ― (DN 22-대념처경)의 법념처(法念處)의 소분류인 사성제(四聖諦)에서 고집성제(苦集聖諦)인 애(愛)와 고멸성제(苦滅聖諦)인 애멸(愛滅)은 삶의 전 과정에서 생겨나 자리 잡는 애(愛)와 버려져 소멸하는 애멸(愛滅)을 설명함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2_09&wr_id=16&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2_09&wr_id=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