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119-몸에 속한 사띠 경)의 중심 주제
kāyagatāsatisuttaṃ (MN 119-몸에 속한 사띠 경)은 사념처(四念處)의 신념처(身念處)에 속한 9가지 소분류 대상에 대한 염처(念處)를 설명합니다. 이때, 대념처경(大念處經)과는 다른 형태의 후렴을 소분류 대상들과 사선(四禪)에 적용하는데,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를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이어서 명(明)으로 연결되는 선법(善法)과 사띠토대의 서술을 통해 깨달음의 전체 과정을 설명합니다.
tassa ev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y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evaṃ, bhikkhave, bhikkhu kāyagatāsatiṃ bhāveti.
이렇게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그에게 세간(世間)의 삶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들이 버려진다. 그것들이 버려질 때 심(心)은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몸에 속한 사띠를 닦는다.
이렇게 경은 후렴을 포함하여 몇 개의 중심 개념을 포함하는데, sarasaṅkappā(기억과 사유)/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심(心)은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vijjābhāgiyā(명(明)으로 연결된)/sati satiāyatane(사띠토대가 있을 때) 등입니다.
[1] sarasaṅkappā(기억과 사유)
1. (MN 66-메추라기 비유 경)
우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무엇이 넷인가?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할 때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그는 그것을 허락하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나는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할 때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나는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할 때 때때로 가끔은 사띠가 혼란해져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우다이여, 사띠의 일어남은 느리지만, 그는 그것을 빠르게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사람이 온종일 달구어진 철판 위에 두세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느리지만 그것은 즉시에 증발해서 사라진다. 이처럼,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기 위해 실천할 때 때때로 가끔은 사띠가 혼란해져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우다이여, 사띠의 일어남은 느리지만, 그는 그것을 빠르게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나는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은 괴로움의 뿌리이다.’라고 알아서 재생의 조건을 벗어나고, 재생의 조건을 파괴하고, 해탈한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나는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속박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우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2. (MN 119-신념처경)
tassa ev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y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이렇게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그에게 세간(世間)의 삶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들이 버려진다. 그것들이 버려질 때 심(心)은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
3. (MN 125-길들임의 단계 경)
그러면, 악끼웻사나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은 코끼리의 다스림을 말한다. ― ‘오라, 코끼리 조련사여, 그대는 숲에 사는 코끼리를 숲속에서의 행동들의 억제를 위해, 숲속에서의 기억과 사유의 억제를 위해, 숲속에서의 걱정과 피로와 열기의 억제를 위해, 마을에 대해 기뻐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행동들에 대한 부추김을 위해 조련하라.’라고.
~
바라문이여, 비구가 사띠-삼빠자나를 갖출 때 여래는 그를 더욱 훈련한다. ― ‘오라, 비구여. 그대는 숲, 나무 밑, 산, 동굴, 골짜기, 묘지, 깊은 숲속, 노지, 짚 더미 등 외딴 처소에서 지내라.’라고. 그는 숲, 나무 밑, 산, 동굴, 골짜기, 묘지, 깊은 숲속, 노지, 짚 더미 등 외딴 처소에서 지낸다.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온 그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다리를 교차하고, 몸을 곧게 뻗치고, 콧구멍 주위에 사띠를 준비한 채 앉아있다. 그는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을 버린 뒤에 간탐 없는 심(心)으로 머문다. 간탐으로부터 심(心)을 청정하게 한다. 그는 진에(瞋恚)의 오점을 버린 뒤에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고 연민하는 분노 없는 심(心)을 가진 자로 머문다. 진에의 오점으로부터 심(心)을 청정하게 한다. 그는 해태-혼침을 버린 뒤에 광명상(光明想)을 가진 자, 사띠-삼빠자나 하는 자로서 해태-혼침 없이 머문다. 해태-혼침으로부터 심(心)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후회를 버린 뒤에 안으로 가라앉은 심(心)으로 동요 없이 머물고, 들뜸-후회로부터 심(心)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버린 뒤에 유익한 법들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자로서 의심을 건너서 머물고, 의심으로부터 심(心)을 청정하게 한다.
그는 심(心)의 오염원이고, 지혜를 무력화하는 것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린 뒤에 몸[신(身)]에서 몸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한다. 경험[수(受)]에서 경험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한다. 마음[심(心)]에서 마음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한다. 법(法)에서 법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한다. 예를 들면, 악기웻사나여, 숲속에서의 행동들의 억제를 위해, 숲속에서의 기억과 사유의 억제를 위해, 숲속에서의 걱정과 피로와 열기의 억제를 위해, 마을에 대해 기뻐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행동들에 대한 부추김을 위해 코끼리 조련사는 큰 말뚝을 땅에 박고 숲에 사는 코끼리의 목을 묶는다. 이처럼, 악기웻사나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 사념처는 세간과 연결된 행동들의 억제를 위한, 세간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의 억제를 위한, 세간과 연결된 걱정과 피로와 열기의 억제를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의 실현을 위한 심(心)의 차꼬이다.
4. (SN 35.96-퇴보하는 법 경)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퇴보하는 법과 퇴보하지 않는 법과 육처(六處)의 지배를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들어라. 그러면 어떻게, 비구들이여, 퇴보하는 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생긴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허락하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나는 선법들로부터 퇴보한다. 세존은 이것을 퇴보라고 말했다.’라고 알아야 한다. …
그러면 어떻게, 비구들이여, 퇴보하지 않는 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생긴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나는 선법들로부터 퇴보하지 않는다. 세존은 이것을 퇴보하지 않음이라 말했다.’라고 알아야 한다. …
그러면 비구들이여, 육처(六處)의 지배는 무엇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세존은 이것을 육처의 지배라고 말했다.’라고 알아야 한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세존은 이것을 육처의 지배라고 말했다.’라고 알아야 한다.
5. (SN 35.151-학생 있음 경)
비구들이여, 이 범행은 학생 없이 선생 없이 살아진다. 비구들이여, 학생이 있고 선생이 있는 비구는 괴롭고 편히 머물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학생이 없고 선생이 없는 비구는 즐겁고 편히 머문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학생이 있고 선생이 있는 자는 괴롭고 편히 머물지 못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생긴다. 그것들이 안에 머문다. ‘악한 불선법들이 안에 머문다.’라고 해서 학생이 있는 자라고 불린다. 그것들이 그에게 쓰인다. ‘악한 불선법들이 그에게 쓰인다.’라고 해서 선생이 있는 자라고 불린다. …
어떻게, 비구들이여, 학생이 없고 선생이 없는 자는 즐겁고 편히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들이 안에 머물지 않는다. ‘악한 불선법들이 안에 머물지 않는다.’라고 해서 학생이 없는 자라고 불린다. 그것들이 그에게 쓰이지 않는다. ‘악한 불선법들이 그에게 쓰이지 않는다.’라고 해서 선생이 없는 자라고 불린다. …
6. (SN 35.244-괴로움의 법 경)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낮 동안 뜨거워진 쇠 가마솥에 두세 방울의 물을 떨어뜨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물방울들의 떨어짐은 느리다. 그러나 그것은 빠르게 소진되고 없어져 버릴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가 때때로 드물게 사띠를 잊고, 악하고 불선한 기억과 사유에 묶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사띠의 생김은 느리다. 그래도 그는 그것을 빠르게 버리고 제거하고 해소하고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행함과 머묾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서, 이런 깨달음으로 행하고 머무는 자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에게 왕들이나 왕의 대신들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지들이나 혈육들이 재물로써 환속시키려고 초청할 것이다. ― ‘오시오, 존자여, 왜 그대는 이 가사 때문에 허비합니까? 왜 깎은 머리로 발우를 뒤따릅니까? 오시오! 낮은 삶으로 돌아와서 재물을 즐기고 많은 복(福)을 지으시오!’라고.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가 공부를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7. (SN 54.8-등불 비유 경)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만약 비구가 ‘나에게 세간(世間)의 삶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들이 버려지기를!’이라고 바란다면, 오직 이것,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의 삼매를 잘 사고해야한다.
[2]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심(心)은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
이 용례는 (MN 20-생각 떠오름의 구성 경)과 (MN 119-신념처경)에 나타나는데,
• (MN 20-생각 떠오름의 구성 경)은 다섯 가지 상(相-nimitta)을 때맞춰 사고(思考)(*)할 때 관심을 동반하고 진(嗔)을 동반하고 치(癡)를 동반하는 악하고 불선(不善)한 생각들은 버려지고 사라짐으로써 심(心)이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고 설명하고,
(*) 다섯 가지 상(相-nimitta)을 때맞춰 사고(思考)
①그 상(相)과는 다른 선(善)을 동반하는 상(相)을 작의(作意)함
②그 생각들의 위험을 살핌
③그 생각들에게 ‘사띠 않음과 작의(作意) 않음’을 실행함
④그 생각들에게 생각의 형성작용의 구성을 사고(思考)함
⑤이와 이를 맞대고 혀로 입천장을 밀어 올리고 심(心)으로 심(心)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태워버림
• (MN 119-신념처경)은 몸에 속한 사띠를 닦으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그에게 세간(世間)의 삶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들이 버려질 때 심(心)이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santiṭṭhati에서는 과거분사인 saṇṭhita와 사역형인 saṇṭhapeti를 주목해야 합니다.
saṇṭhita는 santiṭṭhati의 과거분사인데, santiṭṭhati는 saṇṭhahati 또는 saṇṭhāti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saṇṭhita는 santiṭṭhati/saṇṭhahati/saṇṭhāti의 과거분사입니다.
; santiṭṭhati ― 1. to stand, stand still, remain, continue. 2. to be established, to be put into order. 3. to stick to, to be fixed or settled to be composed. 4. to restrain oneself. 5. to wait for (acc.)
; saṇṭhita: settled; established in. (pp. of saṇṭhāti)
이때, saṇṭhita는 (MN 138-대강의 분석 경)에서 정의됩니다.
“kathañcāvuso, ajjhattaṃ saṇṭhitanti vuccati? 도반들이여, 어떻게 ‘안으로 멈춤’이라고 불립니까?
식(識)이 초선(初禪)~제사선(第四禪)의 느낌을 따라가서 그 느낌의 매력에 묶이고 속박되고 족쇄에 채이는 것
evaṃ kho, āvuso, ajjhattaṃ saṇṭhitanti vuccati 이렇게 도반들이여, ‘안으로 멈춤’이라고 불립니다.
즉 삼매를 닦으면서 개발된 느낌의 매력에 묶여서 심(心)이 일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kathañcāvuso, ajjhattaṃ asaṇṭhitanti vuccati? 도반들이여, 어떻게 ‘안으로 멈추지 않음’이라고 불립니까?
식(識)이 초선(初禪)~제사선(第四禪)의 느낌을 따라가지 않아서 그 느낌의 매력에 묶이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족쇄에 채이지 않는 것
evaṃ kho, āvuso, ajjhattaṃ asaṇṭhitanti vuccati. 이렇게 도반들이여, ‘안으로 멈추지 않음’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asaṇṭhita로서 삼매를 닦으면서 개발된 느낌의 매력에 묶이지 않아서 심(心)이 일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일을 하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saṇṭhita는 이 경에서의 정의 외에 다른 용례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외의 모든 용례는 santiṭṭhati의 사역형인 saṇṭhapeti로 나타날 뿐입니다.
; saṇṭhapeti & saṇṭhāpeti; [Caus. of santiṭṭhati] 1. to settle, to establish. 2. to call to order. 3. to adjust, fold up 진정되게 하다. 진정시키다.
1) saṇṭhapeti ―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i sannisādeti ekodiṃ karoti samādahati? 심(心)을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게 한다.
; (MN 122-공(空)에 대한 큰 경)
2) saṇṭhapemi ―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mi sannisādemi ekodiṃ karomi samādahāmi 나는 심(心)을 안으로 진정되고 가라앉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게 했다
; (MN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 경)/(MN 36-삿짜까 큰 경)
3) saṇṭhapetabbaṃ ―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abbaṃ sannisādetabbaṃ ekodi kātabbaṃ samādahātabbaṃ 심(心)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고 삼매에 들어야 한다.
; (MN 122-공(空)에 대한 큰 경)
4) saṇṭhapetabbaṃ ― ‘kathaṃ nu kho, āvuso, cittaṃ saṇṭhapetabbaṃ? kathaṃ cittaṃ sannisādetabbaṃ? kathaṃ cittaṃ ekodi kātabbaṃ? kathaṃ cittaṃ samādahātabban’ti? 도반이여, 참으로 심(心)을 어떻게 진정해야 합니까? 심(心)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합니까? 심(心)을 어떻게 집중해야 합니까? 심(心)을 어떻게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까?
; (AN 4.94-삼매 경3) ⇒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의 정의
5) cittaṃ saṇṭhapehi ― “atha kho maṃ, āvuso, bhagavā iddhiyā upasaṅkamitvā etadavoca — ‘moggallāna, moggallāna! mā, brāhmaṇa, paṭhamaṃ jhānaṃ pamādo, paṭhame jhāne cittaṃ saṇṭhapehi, paṭhame jhāne cittaṃ ekodiṃ karohi, paṭhame jhāne cittaṃ samādahā’ti 그때, 도반들이여, 세존께서 신통으로 나에게 오신 뒤에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여! 바라문이여, 초선에서 방일하지 말라. 심(心)을 초선에 자리 잡게 하고, 심을 초선에 집중하고, 심을 초선에서 삼매에 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SN 40.1-초선 질문 경)~(SN 40.9-무상(無相) 질문 경)
“atha kho maṃ, āvuso, bhagavā iddhiyā upasaṅkamitvā etadavoca — ‘moggallāna, moggallāna, mā, brāhmaṇa, ariyaṃ tuṇhībhāvaṃ pamādo, ariye tuṇhībhāve cittaṃ saṇṭhapehi, ariye tuṇhībhāve cittaṃ ekodibhāvaṃ karohi, ariye tuṇhībhāve cittaṃ samādahā’ti 그때, 도반들이여, 세존께서 신통으로 나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여, 바라문이여, 성스러운 침묵에서 방일하지 말라. 성스러운 침묵에서 심(心)을 진정시켜라. 성스러운 침묵에서 심(心)을 집중하고, 성스러운 침묵에서 심(心)을 삼매에 들게 하라.’라고.
; (SN 21.1-꼴리따 경)
[3] vijjābhāgiyā(명(明)으로 연결된)
1. (MN 119-신념처경)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몸에 속한 사띠를 닦고 많이 행하는 자는 명(明)으로 연결되는 선법(善法)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마음으로 큰 바다에 닿은 자는 바다로 가는 작은 강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몸에 속한 사띠를 닦고 많이 행하는 자는 명(明)으로 연결되는 선법(善法)들을 포함하고 있다.
2. (SN 55.3-디가부 남신자 경)
“그렇다면 디가부여, 그대는 이 네 가지 예류자의 요소 위에 확고히 선 뒤에 여섯 가지 명(明)으로 연결된 법들을 더 닦아야 한다. 디가부여, 여기 그대는 모든 행(行)에 대해 무상(無常)을 이어 보는 자, 무상(無常)에 대한 고(苦)의 상(想)을 가진 자, 고(苦)에 대한 무아(無我)의 상(想)을 가진 자, 버림의 상(想)을 가진 자, 이탐(離貪)의 상(想)을 가진 자, 소멸(消滅)의 상(想)을 가진 자로 머물러라. 디가부여, 그대는 참으로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명(明)으로 연결된 이 여섯 가지 법들이 저에게 있는 동안 저는 그 법들 위에서 일치된 삶을 살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참으로 저는 모든 행(行)에 대해 무상(無常)을 이어 보는 자, 무상(無常)에 대한 고(苦)의 상(想)을 가진 자, 고(苦)에 대한 무아(無我)의 상(想)을 가진 자, 버림의 상(想)을 가진 자, 이탐(離貪)의 상(想)을 가진 자, 소멸(消滅)의 상(想)을 가진 자로 머뭅니다. 대덕이시여, 그런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 ‘나의 죽음으로 인해 이 조띠까 장자가 고통을 겪지 않기를!’이라고.” “아들아, 디가부야, 너는 그렇게 사고(思考)하지 마라. 여기를 보아라, 아들아, 디가부야, 세존께서 너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너는 잘 사고하여라.”
3. (AN 1.563-584-599-몸에 속한 사띠 품)
누구든지 마음으로부터 닿은 큰 바다가 있는 자에게는 어떤 것이든 바다로 가는 작은 강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닦고 많이 행한 몸에 속한 사띠가 있는 자에게는 어떤 것이든 명(明)으로 연결되는 선법(善法)들이 포함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한 하나의 법은 해탈을 지향하는 큰 열망으로 이끈다. … 큰 이익으로 이끈다. … 큰 유가안온(瑜伽安穩)으로 이끈다. … 사띠-삼빠자나로 이끈다. … 지견(知見)의 획득으로 이끈다. …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끈다. …명(明)과 해탈의 과(果)의 실현으로 이끈다. …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몸에 속한 사띠이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한 이 하나의 법은 해탈을 지향하는 큰 열망으로 이끈다. … 큰 이익으로 이끈다. … 큰 유가안온(瑜伽安穩)으로 이끈다. … 사띠-삼빠자나로 이끈다. … 지견(知見)의 획득으로 이끈다. …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끈다. …명(明)과 해탈의 과(果)의 실현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한 하나의 법에서 몸도 진정되고, 심(心)도 진정되고, 위딱까도 위짜라도 진정된다. 명(明)에 연결된 모든 법도 닦아서 완성된다. 어떤 하나의 법에서인가? 몸에 속한 사띠에서이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한 이 하나의 법에서 몸도 진정되고, 심(心)도 진정되고, 위딱까도 위짜라도 진정된다. 명(明)에 연결된 모든 법도 닦아서 완성된다.
4. (AN 2.22-32 – 어리석은 자 품)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명(明)과 연결된다. 무엇이 둘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익이 뒤따르는가? 심(心)이 닦아진다. 심(心)이 닦아지면 어떤 이익이 뒤따르는가? 탐(貪)이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위빳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익이 뒤따르는가? 지혜가 닦아진다. 지혜가 닦아지면 어떤 이익이 뒤따르는가? 무명(無明)이 버려진다.
탐(貪)에 오염된 심(心)은 해탈하지 못한다. 또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지혜는 닦아진다[닦아지지 못한다(PTS)]. 비구들이여, 이렇게 탐(貪)의 바램[이탐(離貪)]으로부터 심해탈(心解脫)이 있고, 무명(無明)의 바램으로부터 혜해탈(慧解脫)이 있다.
5. (AN 6.35-명(明)과 연결된 경)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명(明)과 연결된 법들이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무상(無常)의 상(想), 무상(無常)에 대한 고(苦)의 상(想), 고(苦)에 대한 무아(無我)의 상(想), 버림의 상(想), 이탐(離貪)의 상(想), 소멸(消滅)의 상(想) ―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섯 가지 명(明)과 연결된 법들이다.
[4] sati satiāyatane(사띠토대가 있을 때) ⇒ 주제의 확장 ― (74)「satiāyatana 사띠토대」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