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의 확장 ― 「망(望)-탐(貪)-진(嗔)-치(癡)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담은 경전들」
; [탐(貪)-진(嗔)-치(癡) 제2권 선별된 경전] 중에서 발췌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wr_id=3에 pdf 파일 첨부
가. 스스로 해야 하는 판단의 기준을 설하는 경들
스스로 해야 하는 판단의 기준
• 버려야 하는 법 ― 망(望)-진(嗔)-치(癡)의 법(法)
• 성취해서 머물러야 하는 법 ―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법
「소문에 의해, 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완성된 성전이라고 해서, 논리를 원인으로, 통설을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의 떠오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세 개의 경들은 모두 「스스로 ‘이 법들은 불선(不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있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 되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不益)과 고통(苦痛)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버려야 하고, 스스로 ‘이 법들은 선(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없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利益)과 행복(幸福)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
세 개의 경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어떤 공부를 만나고, 어떤 실천을 통해 삶을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말합니다. 이때, 버려야 하는 법으로는 망(望)-진(嗔)-치(癡)의 법(法)이, 성취해서 머물러야 하는 법으로는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법이 그 특성들과 함께 제시됩니다.
세 개의 경들은 설해진 환경에 따라 다른 주제를 말하는데,
1) (AN 3.66-께사무띠 경)[깔라마 경]은 께사무띠를 찾아온 여러 스승의 다양한 주장에 대한 께사무띠 사람들의 불확실성과 의심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입니다. 여기서 여러 스승의 다양한 주장은 대부분 저 세상의 문제와 업(業)의 결실의 문제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께사무띠의 사람들에게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을 것을 권합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는 성스러운 머묾을 실천하면 저 세상의 문제와 업(業)의 결실의 문제에 대해 여러 스승이 야기하는 불확실함과 의심을 넘어서고,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위안을 얻습니다.
2)(AN 4.193-밧디야 경)은 ‘사문 고따마는 외도의 제자들을 개종시키는 요술을 아는 요술쟁이다.’라는 비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대해 세상에 있는 고결한 사람들의 부추김의 설명을 통해 귀의시킵니다. 많은 사람을 귀의시키거나 개종시키는 것은 요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바른 법의 힘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다른 두 개의 경들은 모두 망(望)-진(嗔)-치(癡)를 말하는데, 이 경은 격분을 더한 네 가지를 말합니다. 개종시키는 요술로서의 바른 법의 힘이 발휘되려면 격분하지 않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3) (AN 3.67-살하 경)은, 특히, 간탐(慳貪)과 진에(瞋恚)와 무명(無明)이 망(望)-진(嗔)-치(癡)의 머리라는 중요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이 경은 전제된 주제 없이 난다까 존자에 의해 직접 설해진 법이어서 사무량심(四無量心)에 이어 누진(漏盡) 즉 깨달음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깨달은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압니다. ― ‘이전에는 망(望)이 있었다. 그것은 불선(不善)이었다. 그것은 지금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선(善)이다. 이전에는 진(嗔)이 있었다. … 이전에는 치(癡)가 있었다. 그것은 불선(不善)이었다. 그것은 지금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선(善)이다.’라고.
반면에, 「나.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야 하는지?’」에서 소개하는 (MN 95-짱끼 경)은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진리의 보호와 진리에 대한 앎 그리고 진리의 성취를 설명합니다.
나.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야 하는지?
(MN 95-짱끼 경)은 「가. 스스로 해야 하는 판단의 기준을 설하는 경들」이 지적하는바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을 통해 진리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경입니다.
진리[참]는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보호되어야 하고, 알려져야 하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보호하는 방법은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완전한 결론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대상으로 처방된 방법이 아닙니다. 앞의 세 개의 경들이 알려주는 「소문에 의해, 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완성된 성전이라고 해서, 논리를 원인으로, 통설을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의 떠오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완전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확보하지 못한 외도들이 행사하는 진리 아닌 것에 대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부적절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는 ‘이익된다는 전승에 의한, 완성된 성전에 의한 바라문의 선조들의 신성한 말씀에 의한 완전한 결론’을 말합니다.
진리는 불교에 있습니다. 그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기까지의 「믿음 → 가까이함 → 섬김 → 귀를 기울임 → 법을 배움 → 법을 명심함 → 법의 의미를 조사함 → 기쁨 → 관심 → 시도 → 판단 → 정진 → 몸으로 궁극의 진리[참]를 실현하고, 지혜로써 그것을 꿰뚫어 봄 → 진리를 앎」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요소인 믿음의 대상에 대한 검증을 설명하는데, 세 가지 법들 즉 바라기 마련인 법들[망(望)], 거북하기 마련인 법들[진(嗔)], 어둡기 마련인 법들[치(癡)]에 대한 검증입니다. 이렇게 잘 검증된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할 때 진리의 앎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성취하는 방법은 법들의 실천과 수행을 많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진리[참]의 성취가 있고, 이런 방법으로 진리[참]의 성취는 선언됩니다. 그래서 (MN 104-사마가마 경)은 도(道)나 실천에 관한 (일어나지는 것인)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 세 개의 경 ― (AN 3.70-불선(不善)의 뿌리 경)/(AN 3.69-외도 경)/(AN 6.55-소나 경)
(AN 3.70-불선(不善)의 뿌리 경)은 불선(不善)의 뿌리와 불선(不善)과 불선법(不善法), 선(善)의 뿌리와 선(善)과 선법(善法)을 말합니다.
불선(不善)의 뿌리는 망(望)-진(嗔)-치(癡)이고, 불선(不善)은 그러한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이고, 망(望)-진(嗔)-치(癡)의 생김-인연-자라남-조건으로부터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적절한 때에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익 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법에 맞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율에 맞게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망(望)-진(嗔)-치(癡)에서 생긴 악한 불선법들에 의해 억눌리고, 소진(消盡)된 심(心)을 가진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걱정과 절망과 열기가 함께하여 괴롭게 머뭅니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됩니다.
선(善)의 뿌리는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이고, 선(善)은 그러한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이고,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생김-인연-자라남-조건으로부터 다양한 선법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적절한 때에 말하는 사람이고,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고, 이익 되게 말하는 사람이고, 법에 맞게 말하는 사람이고, 율에 맞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망(望)-진(嗔)-치(癡)에서 생긴 악한 불선법들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지금여기에서 걱정과 절망과 열기가 없이 행복하게 머물고, 지금여기에서 완전히 열반합니다.
(AN 3.69-외도 경)은 탐(貪)-진(嗔)-치(癡)의 차이-특별함-다름을 설명합니다. ― 「탐(貪)은 결점은 작지만 바램이 느린 것입니다. 진(嗔)은 결점은 크지만 바램이 빠른 것입니다. 치(癡)는 결점도 크고 바램도 느린 것입니다.」
그리고 생기지 않은 탐(貪)-진(嗔)-치(癡)는 생기고, 생긴 것은 확장되는 원인과 조건을 설명합니다. 생기지 않은 탐(貪)-진(嗔)-치(癡)는 생기지 않고, 생긴 것은 버려지는 원인과 조건을 설명합니다. 정상(淨相)의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 저항의 상(相)의 비여리작의, 부정상(不淨相)의 여리작의(如理作意), 자심해탈(慈心解脫)의 여리작의(如理作意) 그리고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와 여리작의(如理作意)가 설명되는데, 상(相-nimitta)과 작의(作意)에 대한 이해를 비롯한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탐(貪)-진(嗔)-치(癡)가 생기고 버려지는 원인-조건의 이해는 삶의 심오한 영역에 대한 앎을 필요로 합니다. 이 책이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탐(貪)-진(嗔)-치(癡)를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역으로 이 경의 이런 설명은 니까야를 꿰어서 그려내는 삶의 메커니즘의 타당성을 검증해 주기도 합니다.
(AN 6.55-소나 경)은 아라한을 성취한 소나 존자가 부처님을 찾아가서 무위(無爲)의 앎을 설명하는 경입니다.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은 여섯 가지 경우에 대해 분명함이 있습니다. ― 출리의 분명함이 있고, 여읨의 분명함이 있고, 거슬림 없음의 분명함이 있고, 갈애의 부서짐의 분명함이 있고, 집착의 부서짐의 분명함이 있고, 혼란스럽지 않음의 분명함이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여섯 가지는 모두 탐(貪)-진(嗔)-치(癡)의 부서짐과 벗어남으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즉 탐(貪)-진(嗔)-치(癡)가 부서지고, 탐(貪)-진(嗔)-치(癡)로부터 벗어난 출리(出離)의 분명함 내지 탐(貪)-진(嗔)-치(癡)가 부서지고, 탐(貪)-진(嗔)-치(癡)로부터 벗어난 혼란스럽지 않음의 분명함이 있는 것입니다. 탐(貪)-진(嗔)-치(癡)는 이렇게도 깨달음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르게 해탈한 심(心)을 가진 비구에게 만약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로 인식될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들이 많이 영역에 들어온다 해도 심(心)을 소진시키지 않습니다. 섞이지 않은 심(心)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또한, 사라짐을 이어 봅니다.